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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상처’ 삶으로 곱씹은 영원한 이야기꾼, 박완서

꿈꾸는 파사오리 2011. 1. 24. 09:28

시대의 상처’ 삶으로 곱씹은 영원한 이야기꾼
작품 세계는…
전쟁의 상흔과 ‘기억 투쟁’
중산층 속물근성에 일침도
한국 페미니즘 문학 이끌어

 

인생 여정은…
전쟁통에 오빠 비참한 죽음
불혹 등단뒤 왕성한 활동중
남편·아들 잇따라 잃고 통곡
 

 

22일 세상을 뜬 작가 박완서의 문학은 ‘기억을 통한 복수’ 의지에서부터 출발했다. 전쟁 중 좌우 세력 사이에 끼인 오빠의 비참한 죽음을 겪은 작가는 그 고통스러운 경험을 ‘언젠가는 글로 쓰리라’는 증언의 욕구로 힘든 세월을 버텼다. 작가로서의 삶을 회고한 어느 산문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남들은 언제 그랬더냐 싶게 상처도 감쪽같이 아물리고 잘만 사는데, 유독 억울하게 당한 것 어리석게 속은 걸 잊지 못하고 어떡하든 진상을 규명해 보려는 집요하고 고약한 나의 성미가 훗날 글을 쓰게 했고 나의 문학정신의 뼈대가 되지 않았나 싶다.”

 

증언의 욕구와 기억을 통한 복수 의지는 등단작 <나목>에서부터 뚜렷했다. 1950년 겨울 서울을 무대로 삼은 이 소설에서 스무 살 여주인공은 폭격으로 어이없게 죽은 오빠들과 그 때문에 삶의 생기를 놓아 버린 어머니로 인해 황폐해진 자신의 청춘을 상대로 버거운 싸움을 이어 간다.

» 지난 1991년 여름 연길과 백두산 등을 돌아본 뒤 중국 베이징의 북한 음식점에서 일을 하는 북쪽 여성(한복 입은 이)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나목>으로 시작된 그의 ‘기억 투쟁’은 <부처님 근처> <카메라와 워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틀니> <엄마의 말뚝> 같은 단편들로 이어진다. 하나뿐인 오빠를 삼켜 버리고 집안을 무너뜨린 전쟁에 대한 분노와 증언 의지는 이 소설들을 관류하는 일관된 태도라 할 수 있다. 90년대에 발표한 두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도 전쟁에 할퀴인 비통한 가족사를 다시 곱씹을 정도로 작가에게 전쟁 체험은 절대적이었다.

초기 단편들에서 오빠의 죽음을 초래한 전쟁과의 싸움을 ‘일단락’한 작가는 70~80년대에는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와 <도시의 흉년>, 그리고 <주말농장> <저렇게 많이!> 등의 단편에서는 중산층의 허위의식과 속물근성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이와 함께 장편 <살아 있는 날의 시작>과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리고 <지렁이 울음소리> <그 가을의 사흘 동안> <꿈꾸는 인큐베이터> 등의 단편을 통해 그는 한국 페미니즘 문학을 앞장서 이끌기도 했다. 여성문제에 대한 의식은 그가 20대 초에 결혼해서 마흔 살에 등단하기까지 평범한 전업주부로서 겪은 체험에서 빚어져 나왔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는 식의 체험주의적 태도는 박완서 문학을 관통하는 커다란 특징이었다. 그의 유일한 역사소설이라 할 <미망>은 조선 말부터 전쟁기까지를 배경 삼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작가는 자신이 직접 체험하지 않은 시절의 이야기는 어머니의 증언을 듣는 식으로 사실성과 구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던 어머니한테서 어려서부터 들은 숱한 이야기들, 그리고 이를 들으면서 직접 확인한 ‘이야기의 힘’은 박완서 문학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축이었다. 작가는 ‘소설은 이야기다’라는 소박한 신념 아래 ‘뛰어난 이야기꾼이고 싶다’는 바람을 밝히기도 했는데, 그의 소설의 인기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를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대의 대다수가 누리는 일상적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가운데 그 안에 깃든 상처 또는 거짓을 까발려 보이는 것이 박완서 소설의 방법론이다. 그의 작가적 시선이 가 닿는 곳은 얼핏 사소하고 당연하게만 보이는 일상의 세목들이다. 당연히 그의 소설은 이른바 세태 소설의 외양을 띠는데, 그러나 그 안에는 우리네 삶의 무겁고도 근본적인 문제들이 넉넉히 녹아 들어가 있는 것이다. 물 흐르듯 거침없으며 한껏 웃음을 자아내기까지 하는 유머러스한 문체로 치장한 그의 글을 속절없이 따라가노라면 독자는 어느새 세태의 비속성과 허무한 욕망을 향해 따끔하게 일침을 놓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새삼 통쾌하면서도 뜨끔한 복합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익숙한 소재에 친절한 메시지, 그리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읽는 맛을 돋우는 문장은 그의 소설이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비결이었다.

» 중국 티베트를 여행하던 중 티베트 여성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다.

 

문학성과 대중적 인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손에 거머쥐고 거침없이 질주하는 듯하던 그의 작가 인생에 커다란 위기가 온 것은 1988년이었다. 그 해 5월과 8월 그는 남편과 아들을 잇따라 잃는다. 특히 젊고 창창한 외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어려서 잃은 아버지와 젊은 시절 먼저 보낸 오빠, 그리고 남편에 아들까지 집안의 남자들을 차례로 앗아 가는 운명의 심술에 그는 통곡해야 했다. 그는 서울을 떠나 부산의 수녀원에서 한동안 기거하다가 막내딸이 있는 미국에서 머물기도 했다. 당시 잡지에 연재하고 있던 <미망>을 6개월 정도 쉬어야 했지만, 그는 끝내 절망하여 주저앉지는 않았다. 한동안 숨을 고르며 자신에게 닥친 시련의 의미를 곱씹어 본 끝에 나온 것이 일기 <한 말씀만 하소서>와 중편소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었다.

대작 <미망>을 힘겹게, 그러나 끈질기게 마무리한 그는 90년대에 들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두 자전적 장편을 통해 자신을 소설가의 길로 이끈 첫 자리를 차분히 돌아보았다.

 

남들보다 늦게 등단한 것을 벌충이라도 하듯 쉼 없이 글쓰기를 해 온 작가는 60대 이후로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 남녀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노년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과 <친절한 복희씨> 등이 그 산물이다.

2000년대 이후에도 장편 <아주 오래된 농담>과 <그 남자네 집>, 산문집 <호미> <두부> 등을 펴내며 ‘영원한 현역’으로 활동하던 그는 지난해 가을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생전의 마지막 책으로 출간했다. 이 책 서문에서 “또 책을 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소회를 밝혔던 그는 생전에 가 보지 못한 아름다운 길을 찾아 영영 떠났다.

 

고인과 가까웠던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박완서는 역사로부터 입은 고통을 자기 고백의 형식으로 표현해 낸 작가”라면서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만을 작품으로 쓰며, 그 작품들에서 자기를 통째로 드러냈다는 데에 박완서 문학의 개성과 힘이 있다”고 평가했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인간의 허위와 속물근성 낱낱이 까발린 ‘영원한 현역’

 

22일 타계한 소설가 박완서씨는 영원한 현역이었다. 1970년 불혹의 나이로 늦깎이 등단한 후 한국의 어떤 작가보다 정력적으로 소설을 써냈다. 지난 40년간 책을 내지 않은 해가 없다시피 했다.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대중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예민하면서도 신랄한 시선, 현미경 같은 촘촘한 묘사로 실감나게 복원해내는 시대와 개인의 비극에 독자들은 울고 웃었다. 한국문학의 빛나는 성좌, 문단의 거목(巨木)으로 불리는 이유다. “한국 문학사의 맥락과 연대표를 갱신하는 업적을 이룬”(문학평론가 이경호) 문단의 큰 어른이었다.

 문학에 대한 애정이 강렬해서였을까. 그는 담낭암이라는 무서운 병마도 이겨내는 듯 했다. 지난해 9월 발병해 10월 초순에 수술을 받은 후 경과가 좋아 경기도 구리시 아치울 마을 자택과 서울 일원동 삼성의료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투병 중에도 문예지 문학동네의 젊은 작가상 심사를 맡아 병상에서 후보작들을 읽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이 공교롭게도 심사일이었다. 심사장소에 나갈 수 없었던 그는 미리 e-메일을 보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문학상 심사에 참여한 것이다. 그런 그도 끝내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진 못했다. 22일 새벽 갑작스런 호흡 곤란에 이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졌다.

 도도한 강물 같은 그의 문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6·25 전쟁체험이 바탕이 된 것들이다. ‘복수(復讐)로서의 글쓰기’로 표현되는 작품들이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모와 만행을 견디어내야 했다. 그때마다 그 상황을 견디어낼 수 있는 힘이 된 것은 언젠가는 이걸 글로 쓰리라는 증언의 욕구 때문이었다. 도저히 인간 같지도 않은 자 앞에서 벌레처럼 기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오냐, 언젠가는 내가 벌레가 아니라, 네가 벌레라는 걸 밝혀줄 테다.”

 생전 그가 한 글에서 밝혔던 소설을 쓰게 된 이유다. 어떻게 해서도 잊혀지지 않는 참혹한 전쟁체험, 이를 언젠가는 까발리겠다는 앙심(怏心)이 소설 쓰는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고인은 1931년 지금은 북한땅인 경기도 개풍군 박적골에서 태어났다.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던 해 한국전쟁이 터진다.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올케와 함께 북으로 끌려가던 그는 “임진강은 절대로 건너선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고는 극적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생쌀을 씹고 폭격을 피하며 돌아온 서울은 처참했다. 오빠가 좌익활동을 한 죄로 전쟁의 주도권이 바뀔 때마다 남북 양측으로부터 번갈아 수모를 겪었다. 오빠는 끝내 사망한다.

 전쟁체험은 그를 문학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이었다. 오빠를 잃은 상실감, 아들을 먼저 보낸 참척(慘慽)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어머니를 고스란히 지켜본 경험이 그의 자양분이자 수원지인 것이다. 전형적인 ‘억척어멈’이었던 어머니를 소재로 한 ‘엄마의 말뚝’ 연작, 화가 박수근이 등장하는 등단작 ‘나목’ 등이 대표적이다. 연작 형식의 자전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도 한국전쟁의 비중은 상당하다.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음화(陰畵)인 셈이다.

 그는 88년 교통사고로 생때같던 막내 외아들을 잃는다. 서울대 의대를 다니던 잘생긴 아들이었다. 자신의 어머니에 이은 ‘대를 잇는 참척’이었다. 이런 기구한 경험은 단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일기 형식의 소설집 『한 말씀만 하소서』 등으로 나타난다. 모성(母性) 모티프의 변주다.

 나머지 한 갈래는 보다 대중을 겨냥한 세태소설이다. 신문 연재소설 『휘청거리는 오후』가 대표적이다. 결혼 적령기의 여성이 마담 뚜를 통해 부유하지만 아이 둘 딸린 50대 남성과 결혼하는 얘기다. 돈이 우선인 세태,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통렬히 비판했다. 이럴 때 작가의 시선은 야멸차고 냉정하다. “당돌함과 솔직함으로 세상의 허위와 우리 안의 속물적 욕망을 머뭇거림 없이 정면으로 까발기는”(평론가 황도경)특유의 면모다. 평론가 김수이는 독자들이 그런 박완서 소설을 읽을 때 “피학적이며 가학적인 쾌감에 전율하게 된다”고 평하기도 했다.

 22일 빈소를 찾은 평론가 김화영씨는 “선생의 글쓰기는 마치 호미 같다”고 평했다. “모난 곳 없이 둥굴둥글 하면서도 내리찍을 때는 가차 없다”는 것이다. ‘사납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신랄한 시선을 통해 삶의 진상을 온전히 드러내려는 글쓰기. 흉하고 쓰디쓴 인간의 본성, 삶의 알맹이를 드러내는 글쓰기 방법론이다.

 그가 80년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섰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한국작가회의)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다는 사실은 꽤 알려진 얘기다. 이시영 시인은 “작가회의가 어려울 때마다 박완서 선생이 수백 만원씩 도와주는 바람에 버틸 수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이씨는 또 “85년 출판사 창비가 정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자 되살려 내라며 지식인 2853명이 서명한 문서를 박완서 선생이 소설가 황순원·이호철씨 등과 함께 당시 문화공보부에 갖다 냈다”고 했다.

 박씨는 한국전쟁에 의해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거덜나 이념 싸움이라면 누구보다도 넌더리를 냈다. 그런 만큼 균형감각을 가지고 현실과 사회를 고민했다. 평론가 김화영씨는 “고인은 좌도 아닌 우도 아닌 중간에 섰던 분이셨다. 우리 문단에 이런 분이 다시 없다”고 애도했다.

 고인은 황순원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만해문학상, 인촌상, 호암예술상, 보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93년부터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했고 2004년 예술원 회원이 됐다. 2006년 문화계 인사로는 처음으로 서울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발인은 25일 오전 8시 40분. 장지는 용인 천주교 묘지다. 유족으로 장녀 호원숙(작가), 차녀 원순, 삼녀 원경(서울대 의대 교수), 사녀 원균 씨 등 4녀와 사위 황창윤(신라대 교수), 김광하(도이상사 대표), 권오정(성균관대 의대 학장), 김장섭(대구대 교수)씨 등이 있다. 02-3410-6916.

글=신준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