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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이순신 제독에 비교하지 말라. 그 분은 전쟁에 관한 한 신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이순신 제독은 국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서 매번 승리를 끌어내었다. 나를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인 이순신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일본의 해군대장으로서 러일전쟁당시 러시아의 극동함대와 흑해함대를 대파한 일본 해군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남긴 말이다. 1545년(인종 1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1576년 (선조 9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내며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전란의 역사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한 명장이다. 1598년 (선조 31년) 노량해전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전사 할 때까지 지극한 충성, 숭고한 인격, 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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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통솔력으로 문무를 겸비한 이순신 장군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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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물 가운데 한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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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에 소재하는 현충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성역(聖域)으로 지정된 곳이다. 사적 제155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한 현충사는 세계 해전사상 처음으로 장갑선인 거북선을 전술적으로 구사하여 국가의 위난을 구한 민족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서 1706년(숙종 32) 지방 유생들의 건의에 의하여 세워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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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과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위기를 맞았던 현충사는 1932년 동아일보의 국민성금 모으기로 다시 그 모습을 정비했으며 1966년 정부의 대대적인 성역화 작업에 따라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건당시 유물전시관과 활터 등을 새로 만들었으며 국보 제76호인 난중일기와 장검, 옥로, 요대 등의 보물이 소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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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5월 1일 대한민국의 첫 인구조사가 실시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인구조사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 조선 총독부에 의하여 행해진 간이국세조사(簡易國勢調査)가 시초이다. 본 조사는 인구의 성장률, 분포상태, 인구이동, 출산수준 및 취업, 실업 등의 고용상태 등을 파악하여 각종 선거의 법정인구를 확정케 되고 합리적인 경제개발계획 수립 및 가족계획 사업 등의 기초자료가 됨은 물론 국제간의 인구 현황을 비교 연구하게 하는등 광범위한 국가정책 수립의 기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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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로 삼는데 그 목적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농업국가로서 농업정책의 수립은 물론 도시의 인구 집중으로 인한 주택 건설계획의 기초자료로도 사용된다. 또한 본 조사에 있어서는 조사업무 수행 중 알게 된 개인 혹은 단체의 비밀은 보장하고 있으며 조사 결과는 단지 국가정책 수립에만 사용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현제 위나라는 1960년 대규모 조사 이후 현재까지 10년 주기로 실시하며 중간 5년 마다 간이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 통계청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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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의 급격한 팽창 속에서 근로자들의 열악한 근로여건과 비인간적인 삶은 19세기 후반 세계 노동운동의 중심적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1866년 마르크스가 제1차 인터내셔널 강령에서 8시간 노동제의 법제화 등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미국으로 전파되어 당시 광범위한 노동운동으로 전개되었고, 드디어 1884년 5월 1일 미국의 방직노동자의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총파업을 시작으로 1886년 5월 1일 시카고 '노동조합연합회'를 중심으로 노동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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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권리를 되찾고자 전반적인 시위로 번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죽거나 부상당하는 등 강압적인 탄압이 극에 달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1889년 파리 제 2차 인터내셔널 대회에 보고되었고 미국 노동자의 5월 1일 시위를 기념하여 1890년 5월 1일 국제적인 시위운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국제메이데이 행진은 해마다 세계 각국에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과시하는 날로서 메이데이(May D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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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워커스데이(Workers' Day), 노동절(勞動節, Labor Day)로 불리는국제적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중심으로 5월 1일 행사를 치러오다 1958년부터 대한노동조합총연맹(현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창립 기념일인 3월 10일을, 다시 1994년부터 5월 1일로 환원되었다. 명칭 또한 5.16 군사혁명 이후 계급투쟁의식을 내포하는 노동자에서 근로자라는 개념으로 바꾸며 1963년 근로자의 날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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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 만국 박람회, 혹은 수정궁박람회로 불리는 세계최초의 국제박람회가 런던의 하이드파크에서 1851년 5월 1일부터 10월 15일까지 개최되었다. 최신발명품 등 농, 상, 공업 분야의 여러 가지 물품을 모아 전시하는 박람회는 1798년 프랑스 혁명기의 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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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서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이후 1849년까지 파리에서 11회에 걸쳐 개최되며 서서히 규모가 커져 갔고 벨기에, 네덜란드 등 유럽 각국에서도 개최되면서 인기 있는 볼거리로 자리 잡았다. 그때까지의 박람회는 국지적인 형태로 국내전시회의 성격이었으나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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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9년프랑스의 수상이 국제 박람회를 제창해 1851년 제1회 국제 박람회가 런던에서 개최되게 된것이다. 런던 만국 박람회는 큰 성공을 거둔 1844년 프랑스 공업 박람회를 모델로 하여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과 ‘왕립 미술공업상업진흥회’가 주축이 되어 개최하였고, 박람회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수정궁(Crystal Palace)에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유리와 철골로 만들어진 폭 563m 너비 138m의 이 호화로운 대형 건축물은 조지프 팩스턴 경이 설계하여 약 9개월간의 건축기간을 거쳐 1941년 완전히 철거될 때 까지 전시회 건축물의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런던 만국 박람회는 186,000 파운드의 이익을 남겼고 이 이익금은 이용해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 ‘런던 과학박물관’, ‘런던 자연사 박물관’을 설립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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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공중전에 대해 전인미답의 전투기 80대 격추기록을 가진 독일의 전투기 조종사 리히트호펜( Richthofen, Manfred von, 1892.5.2~1918)은 오늘날까지 최고 중에 최고(Ace of aces)로 불리고 있다.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병연대의 장교로서 군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15년 공군으로 전속하면서 천부적인 자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1916년 9월 첫 공중전 이후 1917년 1월까지 16기를 격추해 독일군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고 같은 달 최고의 파일럿들로 구성된 제11전투기중대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4월(영국에서는 ‘피의 4월’로 불리는...) 리히트호펜은 한 달 동안 적기 5대를 격추시키며 그의 비행단과 함께 영국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공중전에서 피아간 식별이 용이하게 하기위해 붉은색으로 도장한 전투기를 사용했던 그의 비행중대는 이후 제1전투비행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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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재편되면서 수많은 에이스를 배출하였고 연합군 측에는 ‘날으는 곡마단’, ‘리히트호펜 곡마단’으로 불리며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항상 빨간색 포커전투기를 타고 다녔던 리히트호펜은 1918년 4월 21일 프랑스부근의 상공에서 격추당하여 전사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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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까지 80대의 격추기록을 남겼으며 그의 이름보다 '붉은 남작(Red Baron)'이라는 닉네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추락한 그의 시신을 수습한 영국군은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며 프랑스에 매장하였고 전쟁 후 베를린 군인묘지로 이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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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꽃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고양세계꽃박람회 (World Flower Exhibition Koyang Korea)가 5월 3일부터 16일간 개최되었다. 28개국 200여 업체가 참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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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하게 치러진 박람회는 130만 여명의 국내·외 관람객이 다녀갔으며 280만불의 수출입계약이 성사되었다. 본 박람회는 고양시의 주최로 국내 화훼산업의 육성과 수출시장 확대를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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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계획되었으며 1999년부터 재단법인 고양세계꽃박람회 조직위원회 만들어져 (사)한국화훼협회와 농협전국화훼협의회의 주관으로 3년마다 한 번 씩 박람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 고양국제 꽃 박람회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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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세계 가톨릭 신자를 대표하며, 그들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920.5.18~2005.4.2)가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한국천주교 주교단의 공동 초청으로 1984년 5월 3일부터 7일까지 5일간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하였다.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이기도 한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폴란드 출신으로 456년 만에 처음으로 선출된 비(非)이탈리아계 교황이며 교회 역사상 최초의 폴란드인 교황이었다. 라틴어뿐만 아니라 많은 현대 언어(폴란드어·이탈리아어·영어·프랑스어·독일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흔치 않는 교황으로서 1978년 10월 16일 교황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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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출된 이래 해외순방을 통해 인류에게 참된 평화, 사랑, 화해의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해왔다. 교황의 방한은,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행사와, 한국천주교 역사상 처음으로 성인 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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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오르는 103위 시성식을 겸하였고, 남북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는 한반도에 사랑과 평화를 심는 방문인 동시에 로마 교황청과의 우의를 다지는 뜻 깊은 계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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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5월 4일 동대문 앞 전차 보관소에는 난생 처음 보는 신기한 것을 구경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날 거행된 역사적인 첫 전차 개통식은 동대문과 경희궁 동쪽 흥화문 구간을 운행 하였고 이어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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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일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정식 운행에 들어갔다. 한성에서 전차, 전등, 전화 사업을 위해 1898년 설립된 한성전기회사가 운영하는 우리나라의 첫 전차 사업은 한성전기회사의 실제 운영을 맡은 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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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콜브란의 주도하에 이루어 졌다. 당시 고종의 잦은 홍릉(명성황후의 릉)행차에 따른 막대한 행차비용의 절감과 백성들의 편리함을 들어 고종의 허락을 받아낸 콜브란은 선로의 부설과 전차의 운행에 대한 독점적인 지위를 행사하였고 지속적인 전차, 전기사업의 확장과 함께 훗날 대한제국 소유였던 한성전기회사를 동업자인 보스윅과 함께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어버렸다. 당시 개통된 전차의 인기는 폭발적이었고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차를 타기위해 몰려들었다고 한다. 전차가 정상 운행되고 며칠 지난 26일 파고다공원 앞에서 일어난 사고로 인해 흥분한 군중들로 인하여 3개월 여간 운행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1968년까지 약 70여 년간 서울의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자립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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