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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 설득하는 김수환 추기경
(서울=연합뉴스)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김수환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12분께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ㆍ서거를 뜻하는 천주교 용어)했다. 향년 87세. 사진은 1994년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인 서울지하철 노조 김인환위원장을 만나 파업을 마무리할 것을 설득하는 김추기경. 2009.2.16 |
한국사회 나아갈 길 밝혀온 큰 횃불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16일 선종한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단지 훌륭한 종교인을 넘어 한국 사회의 큰어른이자 정신적 지도자였다.
"교회는 자기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고 세상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있다"고 말한 김 추기경은 교회 안에서만 머물러있지 않고, 사회로 나와 소신 있는 발언을 잇따라 쏟아내며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을 밝혀온 큰 횃불이었다.
◇소신 있는 정치적 발언 = 1970년대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김 추기경은 소신 있는 정치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민주화 운동의 한 가운데에 섰다.
김 추기경은 1971년 예수성탄대축일 때 장기 집권의 길로 들어선 박정희 정권을 처음으로 공개 비판했다. 전국에 생중계된 이 미사는 강론 말미에 정권의 지시로 중단되기도 했다.
이듬해 7ㆍ4 남북 공동 성명 발표와 8ㆍ3 긴급조치, 10월 유신으로 이어지는 정국의 혼란기에서 주교회의 의장이던 김 추기경은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성명에는 "7ㆍ4 남북 공동 성명을 평화 위장의 전쟁 준비 수단이나 권력 정치의 기만 전술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민족과 더불어 엄숙히 경고한다", "사회 안정과 질서를 흔드는 비상조치를 남발하는 권력의 폭주를 엄계한다"는 등의 강도 높은 발언이 담겼다.
이후 1974년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시작으로 1976년 명동 3ㆍ1절 기도회, 1978년 전주교구 7ㆍ18 기도회 등에서 사제들이 잇따라 구속되면서 고인은 잇단 성명서와 강론을 통해 자유언론과 인권, 민주회복 등을 강조했다.
이러한 김 추기경의 정치적인 참여는 천주교와 정권과의 원치 않는 대립을 낳았으며 교회 내부에서도 교회의 정치 개입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80년대 명동성당이 민주화 운동의 해방구 역할을 하면서 김 추기경의 소신 행보도 이어졌다.
고인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모든 신자들에게 광주를 위한 특별기도를 요청했으며 6ㆍ10 국민운동 당시에는 명동성당에 진입한 시위대를 강제 연행하려던 정부에 단호하게 맞서기도 했다.
◇인권과 노동, 생명 사랑 = 김 추기경의 사회 참여는 비단 정치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의 추구"에 목표를 둔 그는 소외된 자들의 인권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경제 성장이 지상과제이던 1960-1970년대 추기경은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1967년 5월 강화도 심도직물의 노조원 해고 사태 당시 김 추기경의 건의에 따라 주교회의는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대사회 메시지를 던졌다.
이후에도 동일방직 사건 등 유사한 노동 탄압 사례가 있을 때마다 추기경은 노동자 인권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
김 추기경의 인권과 생명 사랑 정신은 사형제 폐지와 낙태 반대에 대한 천주교의 목소리도 키웠다.
1964년 가톨릭 시보사 사장 시절 한 사형수와 깊은 인연을 맺기도 했던 김수환 추기경은 사형이라는 보복성 형벌 대신 용서와 사랑을 강조했으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태아의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풍조를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민족화해ㆍ통일을 향한 열정 = 김 추기경은 매일 미사를 집전할 때마다 항상 마지막 기도와 축복은 북한 신자를 위해 바칠 정도로 통일에 대한 깊은 열정을 나타냈다.
그는 우리 사회 '레드 콤플렉스'가 극심했던 시절에도 서슴 없이 북한 관련 발언을 해 소신을 밝혔다.
1989년 서경원 의원의 방북사건이 있을 무렵 그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남북관계 호전을 바라는 교회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해 북한은 바티칸을 방문했던 김 추기경을 평양에 초대하기도 했는데 그의 방북은 최종 조율단계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김 추기경의 지시로 서울대교구는 1991년부터 각 본당마다 예산의 3%를 통일기금으로 조성하기도 했다.
남북 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남북한 정부를 향한 신중한 발언도 내놓았다.
1993년 북한이 핵무기비확산조약(NPT)을 탈퇴하고 노동1호 미사일을 쏘아올렸을 때 추기경은 북한에 핵문제 청산과 개방을 요구하는 동시에 북한이 미국,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한다고 강조했으며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때는 북한에는 정중한 사죄를, 남한에는 유연한 자세를 촉구했다.
외환위기 때도 어려운 북한 이웃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던 김 추기경은 끝내 고대하던 방북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는 1970~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 했을 뿐이다."


16일 선종한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자신의 회고록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 (2004)에서 엄혹했던 군부독재 시절을 이렇게 돌아봤다. 68년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돼 30년간 재직하면서 국민의 자유와 인권 보장, 민주화에 헌신한 그는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한국인 모두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가톨릭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에 임명된 그는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도 한국 가톨릭의 기틀을 다지고 위상을 높였다. 그는 해외 선교 지원, 북한 동포 돕기 운동과 남북한 교회 교류 활동에도 앞장섰다.
김 추기경은 98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교관 내 추기경 집무실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오래 사는 것'보다 '기쁘게 잘 사는 것'이 더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교회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또다른 삶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조부 김보현(요한)이 1868년 무진박해 때 감옥에서 순교해 유복자로 태어난 김 추기경의 부친은 옹기장수로 영남 일대를 전전하면서 궁핍한 살림을 꾸렸다. 순교자의 후손답게 깊은 신앙심을 가졌던 김수환은 모친의 권유에 따라 형 동환과 함께 성직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김수환은 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 성직자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41년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 도쿄(東京) 유학길에 올랐지만, 당시 김수환은 성직의 길보다 항일독립투쟁에 더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앞서 동성상업학교 졸업반 시절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시험문제가 나오자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고 썼다가 교장에게 불려가 뺨을 맞기도 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51년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장)라는 성구를 선택했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김수환 신부는 66년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주교품을 받았다. 김수환 주교가 택한 사목 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였다.
그는 69년에 추기경으로 서임되는데, 당시 47세로 전 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김 추기경은 "추기경 임명 통보를 받는 순간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인정 받았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다"고 회고한 바 있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서 김 추기경은 한국 교회의 위상을 높이는 데 앞장섰다. 81년 테레사 수녀의 첫 방한을 성사시켰고, 조선교구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처음으로 방한했던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84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89년) 등 굵직한 행사들이 그의 지휘 아래 치러졌다. 김 추기경이 교구장을 맡은 30년간 서울대교구는 48개 본당, 신자 14만여명에서 197개 본당, 신자 121만여명으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말했던 그는 70년대 이후 가난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해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과 서민, 노동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다. 김 추기경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천주교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87년 '도시 빈민 사목위원회'를 교구 자문 기구로 설립했다.
그는 억압받고 가난한 민중들에 대한 관심에 그치지 않고 파행적인 정치 현실에 대한 강경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김 추기경은 71년 성탄 자정미사 강론에서 장기집권으로 치닫는 박정희 정권의 공포정치를 비판했고 이듬해 8월에는 시국성명을 발표, 박 정권과 충돌했다. 이후로도 지학순 주교의 구속(74년)을 시작으로 명동 3·1절 기도회(76년), 전주교구 7·18 기도회(78년) 등으로 사제들이 잇따라 구속되자 김 추기경은 성명서와 강론을 통해 자유언론과 인권, 민주회복을 강조했다.
김 추기경의 정치 참여는 당연히 가톨릭과 정권의 대립 양상을 낳았고, 교회 내부에 교회의 정치 개입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명동성당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해방구로 자리매김됐다.
이처럼 한국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정권을 향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그였지만 엄숙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김 추기경은 2003년 서울대 초청 강연에서 "삶이 뭔가, 너무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기차를 탔다 이겁니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이라고 하는 거죠"라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 KBS < 열린음악회 > 에 출연해 '애모'를 열창하는가 하면, 코미디언 이경규씨와 만났을 때 "추기경님 정말 인중이 긴 것 보니 오래 사시겠다"는 농담을 듣고도 인자한 웃음을 보였다.
민주화의 중요 고비마다 물꼬를 트는 발언으로 '정의의 사도'로 존경받았던 김 추기경은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현실정치 무대의 보수파와 뜻을 같이 하는 발언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우려 섞인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김 추기경은 인권침해의 대명사인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시기상조란 의사를 밝혔다. 2004년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다. 2005년 사학법 정국에서도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는 한나라당을 두둔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정국 때는 촛불시위 자제를 촉구했다.
이를 두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고문인 함세웅 신부가 "김 추기경이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직격탄을 날리는 등 교계 내에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고인의 삶과 신앙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약간씩 이견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한국 사회에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를 철저히 실천해온 신앙인이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 김석종 선임기자 sjkim@kyunghyang.com >
<김 추기경 5.18서신 "부상자 걱정된다">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9.02.18 10:06 | 최종수정 2009.02.18 10:08
편지속에 1천만원 동봉..부상자 치료 등에 쓰여
언론 인터뷰서 "가장 가슴아팠던 일은 광주의 5월"
(광주=연합뉴스) 신재우 기자 =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희생자들과 부상자들을 걱정하는 편지와 함께 거액의 돈을 보낸 사실이 29년 만에 밝혀졌다.
18일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을 지낸 윤공희 대주교(86)에 따르면 윤 대주교는 계엄군이 시민군에 밀려 광주 도심 외곽으로 후퇴하고 봉쇄작전을 펼치던 1980년 5월 23일 김 추기경의 서신을 전달받았다.
김 추기경은 1장짜리 서신에서 "광주에서 많은 사람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크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평화적으로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다급하게 쓴 듯한 짧은 편지 속에는 당시로서는 큰 액수인 1천만원이 현금으로 동봉돼 있었다.
김 추기경은 당시 광주에서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수 편지를 쓴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광주로 진입하는 교통수단이 통제돼 편지를 전해줄 길이 없었던 김 추기경은 군종신부를 통해 편지를 광주로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군과 계엄군이 대치했던 광주 서구 화정동에서 예기치 않게 편지를 전해받은 광주의 사제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고 윤 대주교는 전했다.
윤 대주교는 "군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내란죄로 몰아가고 서슬퍼런 검열이 존재하고 있던 시절이라 편지 속에 많은 이야기가 담기지는 못했지만 광주 시민의 안전을 걱정하는 김 추기경의 마음은 충분히 느껴졌다"고 말했다.
동봉된 1천만원은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 맡겨져 부상자 치료와 구속자 영치금 등으로 쓰였다.
광주 항쟁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김 추기경은 1984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지 선정에서도 광주를 가장 먼저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황은 이에 첫 공식일정을 광주에서 시작했고 미사가 예정됐던 무등경기장으로 곧바로 가지 않고 시민들이 계엄군으로 인해 무참히 희생된 장소인 금남로와 옛 도청 앞 광장을 차로 한 바퀴 돌며 시민의 연도에 화답했다.
이후에도 김 추기경은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가슴아팠던 일은 광주의 5월"이라고 말하며 고통스러운 심경을 밝혀왔다.
그는 언젠가 한 언론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었을 때가 그때였다. 사태가 그대로 알려지지도 않고…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지만 먹혀들어가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은 것 같으니까…"라고 안타까웠던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withwit@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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