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종화의 산실, 진도 雲林山房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합니다. 예술작품 속에는 작가가 추구하는 정신세계, 魂이 녹아 있어 그 가치가 오래도록 후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오래도록 人口에 膾炙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어린시절 농촌마을에서 자라면서 겨울 방학 때 동네 할아버지로부터 서당공부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천자문 뿐 만이 아니라 小學과 朱子十悔訓를 외우고, 고사리 손으로 신문지에 永자 八法을 익힌 후, 천자문을 끝마치면 책거리로 온 동네에 떡을 나눈 아름다운 추억이 생각납니다. 고교시절에는 서예에 조예가 깊으신 국어선생님께서 수업시간 四字成語, 오언(칠언)絶句나 律詩를 칠판에 적고 설명해 주시면 유독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주에 근무하면서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서예학원을 다녔으나 안근례(顔勤禮) 碑文의 해서(楷書) 단계에서 머물렀던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 후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울돌목을 지나 진도의 운림산방과 목포 삼학도 해변에 위치한 남농기념관을 견학하면서 동양화에 관심의 폭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또한 집안에 있는 모사본의 의제 선생의 여덟 폭 병풍의 사계절 산수화의 여백에 쓰여 진 글귀를 보며 작가의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부러움과 경외감을 더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젊은 날들의 꿈이 있었기에 지금도 간혹 붓을 잡아 보지만 재능의 한계에 절망하게 됩니다. 행여 퇴직후 여건이 허락된다면 더 배우고 연마하여 四君子나 휘호(揮毫)를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동양화, 즉 남종화의 산실인 운림산방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 동양화의 이해
학창시절 배웠겠지만, 한국화란 그것이 서양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든, 수묵화처럼 예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그림의 전통을 이어 받아 한국적 소재와 양식을 가지고 한국인에 의해 그려진 그림을 총칭하는 것으로, 보통 한국화하면 먹물로 그려지고 채색은 거의 없는 수묵화를 떠 올리게 됩니다.
보통 동양화를 남화(南宗畵)와 북화(北宗畵)로 크게 분류하는데 그것은 중국 대륙의 구분에 따른 것입니다. 북화가 직업적인 전문 화가들이 선묘를 사용하여 그린 장식적인 그림에 반하여, 남화는 대체로 인격이 고매하고 학문이 깊은 사대부가 여가를 삼아 수묵과 담채를 사용 간결하고 온화하게 그린 그림으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또한, 북화가 대상을 事實的으로 묘사하기 위해 채색을 중시하였다면, 남화는 대체로 事意的인 성격의 文人畵와 같은 의미로 이할 수 있으며, 대상의 형태보다는 그린 이의 정신세계를 표현하여 수묵이 주는 단아한 인상이 많이 강조된다고 합니다.
이는 중국에서 정치의 중심지인 북경과 경제의 중심지인 상해로 나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는 남과 북은 차(茶)의 성향도 달라 북쪽 지역에서 생산되는 차의 잎이 작은 소엽종(小葉種)이 많아 주로 녹차를 만들고, 남쪽에는 잎이 큰 대엽종(大葉種)이 많아 보이차 같은 발효차를 만든다고 합니다.
♣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
남도에는 예향이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문예인 들이 많지만 특히, 전남 진도에는 조선 후기 남화의 대가로 불리는 소치 허련(小痴 許鍊)선생의 화실(畵室)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이 있습니다. 이 곳은 소치가 50세 때인 1857년에 고향인 진도에 돌아와서 지은 화실의 당호인데 그의 셋째 아들 미산 허형(米山 許瀅), 손자인 남농 허건(南農 許楗)이 태어나 남종화의 대를 이은 곳이며, 같은 집안의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이 그림을 익히던 곳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소치선생은 조선후기인 순조 9년(1809)에 전남 진도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는데,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기거하던 초의선사(艸衣禪師)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고산 윤선도의 집인 “녹우당”에 보관되어 오던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의 화첩을 빌어 그림공부를 했고, 그 후 초의선사의 소개로 서울에 올라가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서화수업을 하여 남화의 대가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화실 안에는 허씨 3대의 그림을 복제해서 전시해 놓았고, 새로 지은 유물관에는 복제화, 수석, 도자기 등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허련선생은 나중에 이름을 당나라의 남종화와 수묵 산수화의 효시인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서 허유(許維)라고 바꾸었고, 그의 호 소치는 그의 스승인 秋史 김정희가 원나라 4대화가의 한 사람인 황공만을 대치(大痴)라고 하는데 빗대어서 소치(小痴)라고 지어 주었으며, “압록강 동쪽에는 소치를 따를 사람이 없다(鴨水以東 無此作矣)”고까지 칭찬했다고 합니다.
♣ 5대째 화가 배출한 한국 최고의 예맥(藝脈), 전남 진도
전라남도에는 유배지로 유명한 섬 가운데 진도는 주로 문인(文人)들이 유배 와서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유배형을 받은 사람 가운데는 일반 잡범이 보다는 정치범이 많았는데 그들은 소신을 가질 정도의 철학과 고집, 인문적 교양을 갖춘 사람들로서 보통 출세할 길이 막혔을 때 선택하는 탈출구는 통상 예술가이거나 종교인의 길을 택했다고 합니다. 아마 진도 지역에 유배 온 사람들이 후손중에는 예술 쪽을 많이 택했는지 현재 진도출신 화가는 국선에 입상 경력이상만 16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고 하니, 인구 5만이 채 안 되는 섬에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술가는 미를 통해서 자유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인간이고, 돈과 권력과 같은 세속적 가치를 충분히 향유한 다음에나 가능하다는 설이 있습니다.
‘진도에 가서 글씨, 그림, 노래 자랑하지 말라’ ‘양천 허씨(陽川 許氏)들은 빗자락 몽뎅이만 들어도 명필이 나온다.’는 유행어가 있듯이 내리 5대째 유명화가를 배출한 곳이 운림산방이다. 아마 5대째 계속해서 예술가를 배출하는 집안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그리 흔치 않을 것입니다.
1대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8∼1893), 2대 미산 허형(米山 許瀅: 1861∼1938), 3대 남농 허건(南農 許楗: 1908∼1987)과 동생 임인 허림(林人 許林:1917∼1942), 4대는 임인의 아들인 임전 허문(林田 許文:1941∼현재), 5대는 남농의 손자인 허진(許塡:1962∼현재)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 이외에도 같은 5대 항렬로는 허재, 허청규, 허은이 화가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무등산 춘설헌(春雪軒)의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1891∼1977)도 진도에서 태어난 양천 허씨로 같은 집안이며, 이외에도 미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재학중인 예비화가까지 포함하면 허씨 집안에서 배출된 화가는 30명을 넘나든다고 합니다.
♣ 불우한 천재, 남농 허건
남농은 조부 소치의 예술혼이 뭉쳐 있는 운림산방에서 태어나서 목포 유달산 밑의 죽동에 정착하여 활동하다가 말년에는 “남농 기념관”에서 지어 지금은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그는 37세 때인 1944년 ‘목포의 일우’로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려던 무렵, 골습병에 걸려 왼쪽 무릎 아래를 절단하는 불구의 신세가 되었지만, 오히려 자극이 되어 그림에 정진하다가 80세의 일기로 떠났지만 그의 재능은 오늘까지 남아 있습니다.
남농은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지니는 특유의 인정과 소탈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사정이 어려운 사람이 찾아와 그림을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한 데서 그러한 인정과 소탈함을 엿볼 수 있는데 그러다보니 말년에는 다작을 했다는 비판도 들었다고 합니다. 돈이 있는 사람에게는 넉넉히 받고, 없는 사람에게는 그냥 그려주는 경우가 많았고, 남에게 베풀 수 있는 한 베풀려고 노력하다 보니 그런 비판을 피할 수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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