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인생/신변잡기

어느 선배님의 이-메일

꿈꾸는 파사오리 2011. 10. 29. 09:34

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제 아들은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아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혼자 흐뭇해 하곤 합니다. 그러면서도 적은 교수 월급으로 제 가족과 살아갈 아들의 미래가 불안했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혼을 하게 되면 작은 아파트를 하나 사서 유산으로 물려주기로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그러면 아들이 행복해 하겠거니 생각하면 제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들에게 줄 아파트를 구입할 적지 않은 자금과 상속(증여)세를 마련하는 문제가 숙제였습니다.

 

지난 여름, 아들이 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하였습니다. 함께 있는 40여 일 동안 우리 둘은 청계산, 북악산 등을 산행하고 산행 후 뒤풀이로 막걸리를 마시는 등 즐거운 시간을 여러 차례 가졌습니다. 산행 중 저는 아들에게 세상사는 이야기를, 아들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서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모처럼 부자지간에 가진 화기애애한 소통의 장이었습니다.

 

아들이 방학을 끝내고 해외로 떠나기 전날 밤 가족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저와 산행을 하면서 오순도순 나눈 대화가 아름다운 풍광보다 더 좋았고 참 행복했다고 진지한 얼굴로 말하였습니다.

 

옆에 있던 딸도 저랑 함께 한 행복했던 순간들을 몇 가지 들려주었습니다.

 

아빠가 사무관 때 바쁜 가운데서도 짬을 내서 유치원 행사에 왔다 가곤 했지요. 그때 마다참 고마운 아빠라고 느꼈어요.

 

언젠가 가족 예배를 보자며 아빠가 우릴 불러 모았어요. 홍규와 저는 아빠가 목사님도 아닌데 예배를 본다면서 신기해했어요.

 

미국 쎄인트루이스 대학에서 아빠와 같은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참 흥미로워요. 어떤 딸이 아빠와 같은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겠어요?

 

아이들의 행복했던 추억담을 듣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사실 행복한 추억은 화려하고 거창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저는 이처럼 아주 작은 소소한 추억거리가 아이들을 행복 속으로 빠지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물려줄 물질적 유산도 필요하지만 가슴 속에 깊이 남아 있을 정신적 유산도 더없이 값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즉에 아이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시간 투자를 많이 할 걸 후회를 하였답니다.

 

이미 장성한 아이들에게 어떤 좋은 추억을 남겨 주어야 하나, 고심하고 있던 차에 가까운 지인들의 행복한 추억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회사원 김인경 씨가 가족에 대한 사랑과 행복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내가 갑자기 죽으면 우리에게 남겨 줄 유산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 외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남겨줄 재산이 없다면 아이들에게 우리 아빠는 정말로 우리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잊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랑과 애정을 유산으로 남겨주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

 

김인경씨는 남들처럼 재산을 못 물려줄망정 기억에 남을 추억도 못 물려준다면 내 무슨 낯으로 아이들과 아내에게 자신을 오래오래 기억되기를 바라겠냐며 정신적 유산을 만들어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군인 출신 대머리 아저씨, K씨는 10여 년 전 하늘 길로 떠난 아내를 향한 그리움이 지금도 사무칩니다.

 

제 아내는 암으로 근 6년간 고생하다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이승을 떠나기 며칠 전에 30만원이 들어 있는 봉투를 하나 저한테 건네주더군요. 아내가 병문안 온 지인들이 쾌유를 빈다면서 봉투에 넣어준 돈을 조금씩 모은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죽거든 이 돈으로 가발을 해 쓰고 새 장가 가라고 권유했어요. K씨는 아내의 웃음 띈 얼굴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문득 아이들에게 물려줄 유산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오래오래 마음에 고이는 정신적 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어릴 적 부모님과의 좋은 추억들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삶이 어려워서 늘 상 고생하시던 모습만이 가슴에 남아 있어 때때로 가슴이 저밉니다. 이제 와서 제 아이들에게 아무리 좋은 추억들을 만들어 주려해도 이미 많은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뒤라 그저 생각만 그리 할 뿐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시간은 많습니다. 아이들의 가슴이 찡해지는 좋은 추억을 유산으로 남기려 프로젝트를 하나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상속세와 증여세 없는 유산 물려주기 프로젝트입니다.

 

우선 올해가 가기 전에 딸과는 뮤지컬 보기, 데이트하기, 병원에서 주말 보내기, 우리가족이 살았던 태국 여행하기를, 아들에게는 매일 엄마소식 전하기, 방학 때 한라산 등산가기, 홍콩 여행 등을 할까 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제가 단순히 가족들에게 잘하겠다는 각오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저 혼자만의 놀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평생 기억할 추억을 매년 세 가지 정도 만들자는 구체적인 목표를 정한다면 이 프로젝트는 성공할 것입니다.

 

먼 훗날, 부모님은 나의 좋은 추억거리였다고 기쁜 얼굴로 말 할 수 있도록 추억의 통장을 만들어가겠습니다. 물론, 제 프로젝트가 제 자신에겐 소중한 순간이지만 아이들은 평생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재미난 일들이 펼쳐질지 소풍 앞둔 어린 아이마냥 설레는 마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